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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말리아의 내전은 누구의 책임인가?

기승전미국이 나빠요 빼애애애액! 으로 글을 장식하고 유명한 한겨레에서 또 그런 류의 글이 올라왔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92271.html


[우리도 그 피해를 입어 ‘해적국가’로 잘 알려진 소말리아는 냉전체제가 해체되면서 소련과 미국의 지원이 중단되자 ‘먹을 것은 없어도 총은 많은 나라’가 되었고 굶주린 어민과 농민들은 그 총을 들고 어선으로 외국 배를 공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패국가지수’에서 연속 1위를 차지하는 이 나라의 “진짜 해적은 바다를 빼앗긴 소말리아 어부들이 아니라 그들을 해적으로 내몬 미국의 욕심과 세계은행이나 아이엠에프의 잘못된 조언”(189쪽)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깐 김병익이란 사람은 소말리아가 저렇게 된 것은 미국탓이라는 것인데 아무리 기승전반미로 유명한 한겨레라도 강풀의 소말리아 드립 수준의 글을 아무렇지 않게 올리는 것이 어처구니 없어서 글을 쓴다.


아프리카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제국주의 시대의 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는 것처럼 소말리아 역시 마찬가지다.


소말리아 역시 영국과 이탈리아를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 영향을 받기 이전까지는 유목 생활을 근간으로 한 씨족단위의 경제활동을 영위하며 상호 의존과 포용성을 골자로 하는 히어heer 의식과 이슬람이란 종교적 영향 아래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영국과 이탈리아가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혼란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소말리아와 같이 유목 생활을 근간으로 한 생계유지형사회는 1839년 영국이 예맨의 아덴만에 있는 항구 점령을 시발점으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수에즈 운하에 대한 이해관계에서 비롯되었다.


거의 같은 시기 프랑스는 항구개척을 위해 프랑스령 소말리아 지역에 대한 선점권을 확보하였으며 이탈리아는 남부소말리아를 점령하고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또한 에티오피아의 황제 메니렉Menilek


은 오가덴 지역의 주권을 주장했다.


이렇게 소말리아 민족은 4개의 독립된 국가들에 의해 식민지 경험을 하게 되며 분열적 민족국가를 형성하는데 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 이후 길고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분열적 식민지를 경험하게 되어 지역간 갈등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특히 영국 식민지였던 북부지역과 이탈리아의 식민지였던 남부지역의 갈등은 소말리아 근대 정치조직들간의 분열로 이어진다.


1960년 최초 정부의 출범 선언 후 소말리아가 직면한 문제는 영국과 이탈리아령 소말리아를 통합하는 원칙과 관련된 것이다. 대통령을 포함해서 수상 2/3이상의 관료와 군사와 경찰의 주요 직위는 남부 출신의 정치가들에 의해 채워졌다.

따라서 북쪽 출신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북부지역의 중심지인 하라가시는 수도인 모가디슈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이런 지위상의 박탈감은 작은 규모의 분쟁 발발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압도적인 군사력에 의거한 정부세력에 의해 즉각 진압되었기에 내전으로 확산되지는 않았다.


즉 민족의 정체성 분열과 상대적 박탈감은 내전의 충분 조건이긴 하지만 직접적으로 연결되기에는 아직 무엇인가가 부족한 상태였던 것이다.


소말리아가 내전으로 치닫게 된 이유 중 하나로는 비민주적인 정치체제에 있다.

식민지에서부터 독립한 국가들은 대체적으로 다양한 문제점이 생기게 되고 각 집단들의 이해가 충돌하게 되는데 많은 국가들이 이를 효율적으로 통제하지 못하고 정치적 분열이 가속화되는데 소말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부패가 만연한 비민주적 정치체제는 다수의 정치적 불만족을 야기하게되고 수없이 많은 정치정당들의 출현을 낳게 된다. 


1969년 122개의 의석을 위해 60개 이상의 정당과 1000명 이상의 후보자가 난립한 선거에서 승리를 굳히고자 SYL(소말리아 청년연맹)은 수상인 이브람 이갈(Muhammad Haji Ibrahim Egal)


을 당수로 옹립하며 투표권을 사고 국가의 경찰력 수뇌부들에 대해서는 공공연하게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하도록 압박하였다.


그리하여 선거에서의 승리만을 생각하고 그가 속한 부족의 이익에만 집중하는 활동을 보였다. 이에 항의가 있었지만 대법원은 모두 기각하였고 결국 1개의 정당이 지배하는 국가로 소말리아는 바뀌게 되고 말았다.

이들은 선거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재정을 남용하고 권력과 사적권한의 분할을 위해 사용하였으며 이에 따라 독립정부는 초반 9년간 소말리아 사회가 직면한 문제에 대해 무책임한 작태로 일관하였다.


결국 1969년 시아드 바레가 이끄는 최고 혁명위원회라는 조직과 그 군 지도자들은 쿠데타를 일으키고 처음에는 엄청난 환영을 받았다.


그들은 국민들에게 소말리아를 구제하는 영웅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최고 혁명위원회-SRC는 과학적 사회주의를 공식이데올로기로 채용하여 소말리아 고유언어를 개발하고 성인문맹퇴치, 그리고 기근해결 등의 정책을 집행한다.


그러나 이런 업적들도 결국 1970년대 중반에 사라지고 SRC는 권력집중과 사익재산을 끌어 모으는데 전력을 하고 비밀경찰을 이용하여 사회에 대한 전횡적 무력행사를 서슴치 않으며 이전의 무능한 정권들과 딱히 다른 면모를 보여주지 않게 되었다.


더군다나 바레는 다로드 부족Darod clan에 주로 의존했으며 특히 마레함The Mareham, 돌바하르테Dolba Harte, 그리고 오가덴 부족이 주요 지지 그룹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우월주의를 조장하기도 했다.


이런 그의 정책은 오가덴 전쟁으로 극에 달하게 되는데 오래저누터 에티오피아 영토 내 오가덴에 사는 소말리아인들의 자결권을 주장해왔던 소말리아는 소련제 무기로 무장된 소말리아 군대를 보내 오가덴 지역을 점령하고자 했으나 역시 소련제 무기와 쿠바군의 지원을 등에 업은 에티오피아에 의해 패배하게 되고 이런 패배는 시아드 바레 정권이 내세운 범 소말리아 민족주의 권위를 실추시켰다. 그리고 이에 따라 부족간 갈등이 시작되었으며 바레는 이런 경쟁을 악용하고 억누르며 권력강화를 추구하였으며 이는 1980년대까지 온갖 폭력과 조작 등으로 통하여 이루어졌다.


이런 정치적 혼란 속에서 당연히 경제의 위기가 올 수밖에 없다.

소말리아의 경제는 낙후되었으며 유목과 농경생활의 산물에 의존했지만, 1988년 중반까지 수출품의 80%는 가축이었다.

그러나 생산자들에게 돌아오는 몫은 미미했다. 이에 정부는 농촌지역에 대해 정부 예산을 쏟았지만, 농업생산력 증강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소말리아는 수입식량에 의존하는 사하라 이남의 유일한 국가로 전락했다.


 

1980년대까지 사우디 시장을 위한 호주와의 경쟁은 가격상의 변화를 초래했고 그로 인하여 소말리아 가축 수출가격은 하락하게 된다.


이에 상인들의 이익감소, 외환 축소로 이어지며 채무관계의 부담으로까지 이어졌다.

부족재정, 불건전 생산, 그리고 높은 인구성장률과 더불어 연간 500~800%에 이어지는 인플레이션은 소말리아 경제를 나락으로 이끌어갔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바레 정권은 오가덴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내부의 쿠데타와 저항을 막기 위해 그들을 지지했던 지역의 민간인 뿐 아니라 지역경제기반, 그리고 상하수도 가축 등을 몰살시키는 소위 삼광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또한 부족간 반목을 부추겼기에 열악한 경제사정과 정부의 폭압정책, 정치적 권위의 실종, 지역불균형정책이 이어지고 불만은 고조되었다.


이에 맞서 1981년 소말리아 민족운동(SNM)이 건설되어 바레 정권을 무력으로 전복시키겠다고 공언을 하고 내전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소말리아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였던 할게이사는 대부분이 파괴도었으며 정부군은 그런 와중에도 부족간의 전쟁을 부추겼고 이에 따라 

소말리아 민족운동이 바레 정권을 공격하기 시작한 북부 소말리아 지역은 중앙국가기구가 무너지며 무법천지로 변하였다.


이런 모습은 점차적으로 남쪽으로 이동했고 남부 소말리아에서 출몰한 소말리아 애국운동(SPM)은 1989년 아프마두에서 정부군과 전투를 시작하고 하이에 부족이 이끄는 연대 소말리의회(USC)가 결성되면서 

결국 1991년 국가기구의 몰락을 초래하게 되어 시아드 바레 정부는 국가 수반이 아닌 부족의 이익을 대표하는 그룹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런 군웅할거 속에서 남부 소말리아 지역의 생산적 농업지역이 파괴되고 북부 지역의 가축무역근간이 파괴되어 국가의 지역단위의 재정적 기초가 파괴되었다.


이러한 내전은 냉전이 종식 후에 미국과 소련의 전략적 이해관계가 소멸되고 미소 양국의 경제, 군사적 지원이 단절되며 소말리아 정부의 지배력 약화를 초래하여 내전 발발이 일어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1970년대에는 소련의 경우 이집트와 사이가 악화되면서 소말리아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1974년 7월 친선외교관계 협정을 맺어 소련은 소말리아에 다량의 무기를 제공하고 

동독과의 공조하에 소말리아 내 국가안보기구 창설을 지원했다. 이는 시아드 바레의 사위인 술레이만에 의해 운영되면서 바레 정권의 정치통제와 감시활동에 있어 효과적 기능을 하였다.


그 때문에 벨베라 Berbera에 소련 해군 기지가 들어서고 미사일기지와 연락기지, 연료저장시설, 그리고 궁군기 이착륙시설이 들어서고 수도인 모가디슈에는 공군시설까지 설치되었다. 

그러나 소말리아는 소련과의 관계를 좋아하진 않았고 오히려 미국과의 관계를 맺고 싶었고 만약 소말리아에 대한 군사, 경제적 지원을 받는다고 소련군 철수를 하겠다는 약속까지 받았다.


결과론적으로 오가덴 전쟁에서 소련은 에티오피아의 편에 섰기에 소말리아는 소련기지를 폐쇄하고 미국의 편에 서게 된다.

그러나 소말리아의 생각과는 달리 미국은 소말리아에 큰 전략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기에 소말리아는 소련의 해군기지를 미국에게 10년간 이용하는 댓가로 20억불을 요구했을 때 미국은 2년간 사용하면서 4백만 불 이상의 지불 의사가 없음을 분명하게 밝히기도 했다.


이는 당시 미국의 전략적 이해관계에서 남서부아시아와 인도양의 이해관계에 대해 케냐와 소말리아는 단지 일종의 겉절이에 불과했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냉전이 종식되고 미국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버렸다.

이리하여 결국 소말리아는 블랙호크다운의 시기로 돌입하게 되어 버린다.


-소말리아 내전의 원인에 관한 연구 참조


요약

왜 소말리아가 현재와 같이 '실패한 국가'가 되었는가 

1. 제국주의 국가들이 소말리아를 4개로 분할하면서 부족간 반목이 시작 

2. 독립 이후 민주정권이란 놈들이 부패와 기득권 유지, 자기네 부족만 신경쓰면서 내부의 불만을 사고 경제는 위기에 봉착

3. 진짜로 무능하기 짝이 없던 정권을 쿠데타 정권이 뒤짚음. 초기에는 환영을 받았지만, 몇년 후 본색을 드러내면서 더 심한 비리와 자기 부족만 챙기는 모습을 보임

4. 오가덴 전쟁을 일으켰지만 소련의 지원을 받은 에티오피아군에 패배. 열 받아서 소련과의 관계 정리하고 미국에 붙었지만, 미국에게 있어 소말리아는 별로 매력적이지 못해서 생각보다 지원을 못받음

5. 그래도 나름 지원을 받았는데 냉전이 끝나니 지원도 끊김. 여기에 바레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한 내전이 시작. 안 그래도 최악의 경제상황은 나락으로 떨어짐. 바레 정권은 축출 

6. 그리고 블랙호크다운의 시기로 돌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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